맨위로가기

자크 마크도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자크 마크도날(É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원수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아일랜드 군단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혁명군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러시아 원정 등에 참여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의 공로로 프랑스 원수가 되었으며, 타란토 공작으로 봉해졌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부르봉 왕가 밑에서 계속 봉직하며 '솔직한 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1840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대귀족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이자 정치가로, 소설을 집필하고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옹호하다가 1848년 혁명 중에 사망했다.
  • 프랑스의 대귀족 -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뛰어난 군사 전략과 공화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부르봉 왕정 복고 후에는 전쟁 및 해군 장관을 역임했고 화가와 음악가로도 활동했다.
  • 스코틀랜드계 프랑스인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스코틀랜드계 프랑스인 - 프랑수아 2세
    프랑수아 2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프랑스 국왕(재위: 1559년-1560년)이었으나, 어리고 병약하여 기즈 가문이 득세하고 앙부와즈 음모, 재정 위기, 종교 갈등 속에 귀 질환으로 요절하여 샤를 9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자크 마크도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투안 장 그로가 그린 마크도날 초상화
앙투안 장 그로가 그린 초상화
출생명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
출생1765년 11월 17일
출생지스당, 프랑스
사망1840년 9월 25일
사망지볼리외쉬르루아르, 프랑스
별칭해당 없음
경력
소속프랑스 왕국
프랑스인의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
군종육군
복무 기간1785년–1830년
최종 계급제국 원수
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마프 전투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치비타 카스텔라나 전투"
** 모데나 전투
** 트레비아 전투
* 나폴레옹 전쟁
**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바그람 전투
** 반도 전쟁
*** 엘 플라 전투
*** 피게라스 포위전
*** 세르베라 전투
**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 리가 포위전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뤼첸 전투
*** 바우첸 전투
*** 카츠바흐 전투
*** 라이프치히 전투
*** 프랑스 북동부 전역
**** 로브레셀 전투
수상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기타 정보
이후 활동레지옹 도뇌르 훈장 총장
서명Signatur Jacques MacDonald.PNG

2. 가문 배경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1][3]은 프랑스 세당에서 스코틀랜드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자코바이트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성은 영어식으로 '맥도널드'라고 표기되기도 한다.[22] 그의 아버지 닐 맥이천 맥도날드는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 참전했던 군인이자 전쟁 시인이었다. 닐 맥이천 맥도날드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프랑스 탈출을 도운 플로라 맥도날드와 가까운 친척이었으나,[9] 닐은 플로라가 스튜어트 왕가와 하노버 왕가 양쪽에 아첨하려 했다고 비판했다.[10]

2. 1. 스코틀랜드계 자코바이트 후손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1][3]은 프랑스 세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닐 맥이천 맥도날(Neil MacEachen MacDonald)은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 참전했던 스코틀랜드 아우터 헤브리디스 사우스 우이스트의 하우베그 출신으로, 래널드 씨족(Clan MacDonald of Clanranald) 사람이었다.[10] 닐 맥도날드는 파리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이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신임을 얻었다.

닐 맥도날드는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가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던 플로라 맥도날드와 가까운 친척이었다.[10]

닐 맥이천 맥슈머이스(Niall mac Eachainn mhic Sheumais)는 런던탑에서 석방된 후 게일어로 쓴 시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왕자를 보호했음에도 플로라 맥도날드가 스튜어트 왕가와 하노버 왕가 양쪽에 아첨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닐은 왕자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고 프랑스 망명길에 동행했으며, 프랑스 귀족과 결혼했다.[10]

마크도날은 스코틀랜드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샤를 소왕)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자코바이트의 후손이다. 그의 성은 영어식으로 '맥도널드'라고 표기되기도 한다.[22]

2. 2. 플로라 맥도날드와의 관계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의 아버지 닐 맥이천 맥도날(Neil MacEachen MacDonald)은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 참전했던 군인이자 전쟁 시인이었다.[1] 닐 맥이천 맥도날드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프랑스 탈출을 도운 플로라 맥도날드와 가까운 친척이었다.[9]

하지만 닐 맥이천 맥도날드는 플로라 맥도날드가 스튜어트 왕가와 하노버 왕가 양쪽에 아첨하려 했다고 비판했다.[10] 그는 플로라 맥도날드가 왕자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스러운 발걸음을 하며 양쪽에 아첨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닐 맥이천 맥도날드는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프랑스 망명길에 올랐으며, 프랑스 귀족과 결혼했다.[10]

3. 군 경력

자크 마크도날은 1784년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아일랜드 군단에 합류하면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12] 이후 프랑스 왕립군의 아일랜드 여단인 딜런 연대에 소속되었다.[12]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주요 부대를 이끌며 활약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원정, 반도 전쟁(1810~1811년), 러시아 원정(1812년), 여섯 번째 동맹 전쟁(1813년 독일, 1814년 프랑스)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15]

1809년까지는 별다른 직무를 맡지 못하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 총독이자 이탈리아 군 사령관인 외젠 드 보아르네 공의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다.[16] 바그람 전투에서 그의 군단은 오스트리아군 중앙부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전투 후 나폴레옹은 그를 프랑스 원수로 임명하고, 나폴리 왕국의 타란토 공작(duc de Tarente)으로 봉작했다.[12][16]

1812년 러시아 침공에서 그랑 아르메프랑스어의 좌익을 지휘했으나, 리가 점령에는 실패했다.[12] 1813년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 참전 후 슐레지엔 침공을 명령받았으나, 카츠바흐 전투에서 블뤼허에게 대패했다.[12]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포냐토프스키 공과 함께 라이프치히 철수를 엄호하던 중, 다리가 폭파된 후 엘스터 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다.[12]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나폴레옹의 퇴위 소식을 파리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도 충성을 유지하여 무라드 베이의 칼을 받았다.[12]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주요 부대를 이끈 마크도날


타란토 공작 자크 마크도날의 문장

3. 1.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

1784년, 맥도널드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아일랜드 군단에 합류하여 1785년 4월 1일 중위로 임명되었다.[12] 군단 해산 후 그는 프랑스 왕립군의 아일랜드 여단인 딜런 연대에 소속되었다.[12]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딜런 연대는 국왕에게 충성을 지켰지만, 맥도널드는 열렬한 혁명가인 아버지를 둔 자크브 양에게 반했고 예외였다.[12] 1791년 5월 5일 결혼한 후, 1792년 8월 17일 대위로 진급했고, 1792년 8월 29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2] 그는 젬맵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792년 11월 12일 중령으로, 1793년 3월 8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뒤무리에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 보상으로 1793년 8월 26일 '''général de brigade'''으로 임명되어 피슈그루의 네덜란드 침공에서 선봉 여단을 지휘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그의 지식은 유용했고, 1795년 1월 프랑스 헝가리 기병이 네덜란드 함대를 포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1794년 11월 '''général de division'''으로 임명된 그는 1797년 라인 군에[12], 이후 1798년 4월 24일 이탈리아 군에 복무했다. 그가 1798년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캄포 포르미오 조약은 1797년 10월 18일에 체결되었고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베르티에의 지휘 아래 맥도널드는 1798년-1799년 로마 공화국의 로마를 점령했고, 1798년 11월 19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샹피옹네와 함께 막 장군을 페르렌티노 전투, 오트리콜리 전투, 1798년 12월 5일 치비타카스텔라나 전투, 그리고 먼저 칼비 리소르타에서, 그리고 1799년 1월 3일 카푸아에서 두 번의 군사 작전에서 패퇴시켰다. 1799년 1월 10일 샹피옹네와의 불화로 사임했다. 그러나 어떤 불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282-1799년 나폴리 왕국을 정복했고, 그것은 나중에 파르테노페이아 공화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군 장군 수보로프1799년 3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보나파르트의 정복을 무효화하고 카사노와 산 줄리아노에서 모로를 패배시켰다. 이에 맥도널드는 '''Armée de Naples'''을 지휘하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3만 5천 명의 병력으로 트레비아에서 수보로프의 2만 2천 명의 병력을 공격했다. 사흘간의 전투 끝에 모로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완전히 패배하여 제노바로 후퇴했다.[13] 나중에 그는 베르사유의 총독이 되었고,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8 브뤼메르 사건에 묵인했다.[12]

1800년 그는 헬베티아 공화국의 군대 지휘를 받아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대 사이의 연락을 유지했다.[12] 그는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고, 1800년-1801년 겨울에 그는 그리존 군을 이끌고 슈플뤼겐 고개를 넘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업적은 그의 참모총장인 마티외 뒤마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것은 맥도널드가 전투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렝고 전투 이전에 보나파르트가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것만큼 주목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14]

3. 2. 나폴레옹 전쟁 시기

1784년, 맥도널드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하는 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아일랜드 군단에 합류하여 1785년 4월 1일 중위로 임명되었다.[12] 군단 해산 후 그는 프랑스 왕립군의 아일랜드 여단인 딜런 연대에 소속되었다.[12]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딜런 연대는 국왕에게 충성을 지켰지만, 맥도널드는 열렬한 혁명가인 아버지를 둔 자크브 양에게 반했고 예외였다.[12] 1791년 5월 5일 결혼한 후, 1792년 8월 17일 대위로 진급했고, 같은 해 8월 29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2] 그는 젬맵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792년 11월 12일 중령으로, 1793년 3월 8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뒤무리에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 보상으로 1793년 8월 26일 '''général de brigade'''으로 임명되어 피슈그루의 네덜란드 침공에서 선봉 여단을 지휘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그의 지식은 유용했고, 1795년 1월 프랑스 헝가리 기병이 네덜란드 함대를 포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1794년 11월 '''général de division'''으로 임명된 그는 1797년 라인 군에[12], 이후 1798년 4월 24일 이탈리아 군에 복무했다. 그가 1798년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캄포 포르미오 조약은 1797년 10월 18일에 체결되었고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베르티에의 지휘 아래 맥도널드는 1798-1799년 로마 공화국의 로마를 점령했고, 1798년 11월 19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샹피옹네와 함께 막 장군을 페르렌티노 전투, 오트리콜리 전투, 1798년 12월 5일 치비타카스텔라나 전투, 그리고 먼저 칼비 리소르타에서, 그리고 1799년 1월 3일 카푸아에서 두 번의 군사 작전에서 패퇴시켰다. 1799년 1월 10일 샹피옹네와의 불화로 사임했다. 그러나 어떤 불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282-1799년 나폴리 왕국을 정복했고, 그것은 나중에 파르테노페이아 공화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군 장군 수보로프1799년 3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보나파르트의 정복을 무효화하고 카사노와 산 줄리아노에서 모로를 패배시켰다. 이에 맥도널드는 '''Armée de Naples'''을 지휘하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3만 5천 명의 병력으로 트레비아에서 수보로프의 2만 2천 명의 병력을 공격했다. 사흘간의 전투 끝에 모로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완전히 패배하여 제노바로 후퇴했다.[13] 나중에 그는 베르사유의 총독이 되었고,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8 브뤼메르 사건에 묵인했다.[12]

1800년 그는 헬베티아 공화국의 군대 지휘를 받아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대 사이의 연락을 유지했다.[12] 그는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고, 1800년-1801년 겨울에 그리존 군을 이끌고 슈플뤼겐 고개를 넘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업적은 그의 참모총장인 마티외 뒤마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것은 맥도널드가 전투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렝고 전투 이전에 보나파르트가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것만큼 주목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14]

파리로 돌아온 맥도널드는 주베르 장군의 미망인과 결혼했고, 덴마크 대사로 임명되었다. 1805년 귀국하여 모로와 연루되어 나폴레옹의 반감을 샀고, 최초의 원수 임명에서 제외되었다.[12] 나폴레옹은 1803년부터 1809년까지 그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지 않았다.[15]

1809년까지 직무 없이 지내다가 나폴레옹이 그를 이탈리아 왕국(나폴레옹)의 총독이자 이탈리아 군 사령관인 외젠 드 보아르네 공의 군사 고문으로 임명했다.[16]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한 후, 나폴레옹은 외젠의 군대를 북쪽으로 불러들여 자기 군대에 합류시켰고, 마크도날도 함께했다. 바그람 전투 이틀째, 전선 전체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자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에게 적 중앙을 향해 필사적인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마크도날은 즉시 낭수티의 기병대가 엄호하는 거대한 삼면 개방형 보병 사각형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군 진영에 돌격했다. 오스트리아군 포병의 엄청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한 공격은 오스트리아군 중앙을 붕괴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12][16]

전투 후,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그를 찾아 나선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용감하게 싸웠소...어제의 승리에 당신의 공이 큰 이 영광의 전장에서 당신을 프랑스 원수로 임명하겠소.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그 자격이 있었소." 게다가 나폴레옹은 곧 그를 나폴리 왕국의 타란토 공(duc de Tarente)으로 봉작했다.[12][16]

1810년 마크도날은 스페인에서 복무했고, 1812년에는 러시아 침공을 위해 그랑 아르메프랑스어의 좌익을 지휘했다. 그는 북쪽으로 파견되었지만 리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1813년,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 참전한 후, 그는 슐레지엔 침공을 명령받았고, 그곳에서 블뤼허가 카츠바흐 전투에서 그를 크게 격파했다.[12] 1813년 민족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리베르트볼크비츠 전투에서 요한 폰 클레나우의 제4군단(오스트리아군)에 의해 밀려났다. 반격에서 그의 부대는 마을을 탈환했다. 같은 날, 클레나우는 슈바르첸베르크 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본군을 측면 공격하려는 그의 시도를 저지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후, 그는 포냐토프스키 공과 함께 라이프치히 철수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강을 건너는 마지막 다리가 폭파된 후, 그는 엘스터 강을 헤엄쳐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포냐토프스키 공은 익사했다.[12] 1814년 방어전에서 마크도날은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퇴위 소식을 파리에 전달하도록 나폴레옹이 보낸 원수 중 한 명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폴레옹을 버렸을 때, 마크도날은 충실함을 유지했다.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새로운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의 충성심에 대한 보상으로 무라드 베이의 칼을 받았다.[12]

4.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 복고 시대에 마크도날은 프랑스 귀족이 되었고 왕립 성 루이 훈장의 그랑크루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백일천하 기간 동안에도 새로운 질서에 충실했다.[12] 181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대장이 되었고 1831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16년에는 왕실 근위대 사령관으로서 1814년 헌장에 따라 설립된 귀족원의 토론에 참여하여 온건 자유주의자로서 일관되게 투표했다.[12]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 이후에도 마크도날은 부르봉 왕가 밑에서 계속 봉직했다.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루이 18세 국왕으로부터 "솔직한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17]

왕정 복고 하에서는 귀족에 서임되었다. 백일 천하 때에는 나폴레옹에게 가담하지 않고 루이 18세를 호위했다. 1816년에는 1814년 헌장에 따른 귀족원에 참여했다.

5. 사후 평가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마크도날이 군사적 천재성은 부족했지만, 독립적인 지휘 능력은 뛰어났으며,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2] 군사 역사가 군터 E. 로텐베르크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고,[21] 리처드 던-패티슨은 "날카로운 군사적 통찰력"을 칭찬했다.[16] 반면, A. G. 맥도넬은 그의 경력을 일련의 패배라고 평가했고,[14] 존 M. 키프는 카츠바흐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 부재 시 프랑스군의 참모 부족 탓으로 돌리며, 이후 마크도날은 성공적으로 싸웠다고 주장했다.[15]

5. 1. 엇갈리는 평가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마크도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Although Macdonald had not the military genius of 다부, 마세나 or 란, or the science of 마몽 or 생시르, his campaign in Switzerland gives him a far higher place than any of them, and, comparing him with the mere divisional generals like 우디노 and 뒤퐁, the superiority of Macdonald is very marked. This capacity for independent command, which he was almost alone in possessing, was the reason why, in spite of the defeats of the Trebbia and the Katzbach, he was retained by Napoleon to the end of his career in high commands. As a man, his character cannot be too highly praised; no stain of cruelty or faithlessness rests on him.영어[12]

즉, 마크도날은 다부, 마세나, 란과 같은 군사적 천재성이나 마몽, 생시르에게서 보이는 군사 과학적 재능은 부족했지만, 스위스 원정에서 보여준 능력은 우디노나 뒤퐁과 같은 사단장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지휘 능력 덕분에 나폴레옹은 트레비아 전투와 카츠바흐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마크도날에게 계속해서 대규모 지휘권을 맡겼다. 또한, 인간적으로도 잔혹함이나 불신실함이 없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2]

군사 역사가 군터 E. 로텐베르크는 마크도날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했지만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21] 리처드 던-패티슨은 마크도날의 "날카로운 군사적 통찰력"을 칭찬했지만,[16] A. G. 맥도넬은 그의 경력을 일련의 패배라고 평가했다.[14] 존 M. 키프는 카츠바흐에서의 패배를 나폴레옹이 지휘하지 않는 프랑스군의 참모 부족 탓으로 돌리며, 마크도날은 이후 성공적으로 싸웠다고 주장했다.[15]

6.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마리-콩스탕스 소랄 드 몽트루아지르 (1797년 사망)
펠리시테-프랑수아즈 드 몽톨롱 (1780–1804)알렉산드린-아임 마크도날 (1803–1869)
에르네스틴-테레즈 드 부르고잉 (1789–1825)루이-마리 마크도날 (1824–1881, 타렌트 공작 2세)


7. 스코틀랜드 유산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É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1][3]의 아버지는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10] 참전 용사이자 전쟁 시인이었던 닐 맥이천 맥도날(Neil MacEachen MacDonald)이었다. 닐 맥도날드는 스코틀랜드(Kingdom of Scotland) 아우터 헤브리디스의 사우스 우이스트에 있는 하우베그(Howbeg)의 맥도날드 씨족(Clan MacDonald of Clanranald) 출신으로, 파리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잠시 공부하며 프랑스어 실력을 익혔고, 이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에게 호감을 샀다.[1]

닐 맥도날드는 삼촌이자 동료 게일어 시인이자 자코바이트 장교였던 알라스데어 맥 마히스터 알라스데어[9]와 마찬가지로,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컬로든 전투 패배 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의 프랑스 탈출을 도왔던 플로라 맥도날드와 가까운 친척이었다.[1]

런던탑에서 석방된 후 지은 게일어 시에서 니얼 맥 이천 맥 슈머이스(Niall mac Eachainn mhic Sheumais)는 사냥당하는 왕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처했던 사촌 플로라 맥도날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플로라가 태평스러운 발걸음을 했다고 주장하며 스튜어트 왕가와 하노버 왕가 양쪽 모두에게 아첨하려 했지, 선택을 하고 그것을 고수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닐은 왕자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망명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프랑스 귀족과 결혼했다.[10]

1820년대 후반, 반란 이후 왕자의 헤브리디스 체류에 대한 "유창하고 매력적이며 확실히 진실된 이야기"인 맥 이천의 부분 원고가 파리의 이발사의 손에 발견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닐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1825년에 사우스 우이스트를 방문하여 자신의 족보를 조사하려던 마크도날 원수는 그 원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11]

2010년 4월 30일, 마크도날의 가족이 살던 곳인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의 사우스 우이스트 섬에 프랑스 원수 자크 마크도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마크도날은 1825년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사우스 우이스트를 방문한 바 있다.[20]

참조

[1] 서적 Le Petit Robert des noms propres French edition
[2] 웹사이트 Eugène de Beauharnais https://www.universa[...] 2021-02-05
[3] 웹사이트 Notice de personne : Macdonald, Étienne-Jacques-Joseph-Alexandre (1765-1840) https://catalogue.bn[...] 2021-02-07
[4] 서적 Bulletin des lois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https://books.google[...] Impr. Nat. des Lois
[5] 서적 The History of the Restoration of Monarchy in France https://books.google[...] H. G. Bohn
[6] 서적 Military and Diplomatic Career of Jacques Étienne MacDonald https://diginole.lib[...] Florida State University
[7] 서적 Military and Diplomatic Career of Jacques Étienne MacDonald https://diginole.lib[...] Florida State University
[8] 서적 Military and Diplomatic Career of Jacques Étienne MacDonald https://diginole.lib[...] Florida State University
[9] 서적 Ships of the Forty-Five: The Rescue of the Young Pretender Hutchinson & Co.
[10] 서적 We're Indians Sure Enough: The Legacy of the Scottish Highlanders in the United States Saorsa Media
[11] 서적 Ships of the Forty-Five: The Rescue of the Young Pretender Hutchinson & Co.
[12] 백과사전 Macdonald, Jacques Etienne Joseph Alexandre
[13] 문서 Battle of Trebbia (1799) infobox
[14] 서적 Napoleon and his marshals Prion
[15] 서적 Failure In Independent Tactical Command: Napoleon's Marshals In 1813 Wagram Press
[16] 서적 Napoleon's Marshals https://archive.org/[...]
[17] Youtube https://www.youtube.[...]
[18] 웹사이트 Castle of Courcelles-le-Roi http://www.napoleon-[...]
[19] 서적 Histoire de la Maison royale de France https://books.google[...]
[20] 웹사이트 South Uist honour for Scot who was one of Napoleon's generals http://www.heraldsco[...]
[21] 서적 The emperor's last victory : Napoleon and the Battle of Wagram Weidenfeld & Nicolson
[22] 문서 일반적인 맥락에서의 Macdonald 이름 표기법에 대한 설명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